수수료 0원의 총비용

정기결제·가상계좌·계좌이체, 수납 채널의 트레이드오프

퇴사를 앞둔 마지막 해에 만든 화면이 하나 있습니다. 미납을 관리하는 화면입니다. 밀린 청구를 목록으로 세우는 수수한 기능인데, 오픈갤러리에서 결제를 맡은 11년의 결론을 이만큼 잘 요약하는 물건도 없습니다. 수수료가 0원인 길이 대개 가장 비쌉니다. 이 글은 어느 회사의 선택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돈이 들어오는 길들이 각각 무엇을 대신해 주는지 정리한 것입니다.

돈이 들어오는 세 갈래 길

카드 정기결제는 한 번 등록해 두면 매달 자동으로 청구되고 수납됩니다. 빌링결제나 자동결제로도 부르는 방식입니다. 카드 만료나 한도 초과 같은 예외를 빼면 고객도 회사도 신경 쓸 일이 가장 적습니다. 대신 결제액의 3% 안팎이 수수료로 나갑니다.

가상계좌는 고객이나 청구 건마다 전용 입금 계좌를 내어 주는 방식입니다. 입금되는 순간 통지가 시스템에 들어오니, 누가 얼마를 냈는지 사람이 따져 볼 필요가 없습니다. 수수료는 건당 몇백 원입니다.

직접 계좌이체는 회사 통장으로 바로 입금을 받는 방식이고, 수수료는 없습니다. 세 방식을 나란히 놓으면 아래로 갈수록 싸 보이고, 매출이 클수록 그 차이도 커집니다. 그래서 다달이 요금을 받는 곳이라면 어디든 한 번쯤 이 목록을 아래에서부터 다시 읽게 됩니다. 합리적인 검토지만, 0원이라는 숫자는 가격표가 아닙니다.

0원의 내역서

계좌이체 수납이 굴러가려면 누군가 통장 입금 내역을 열어, 입금자명과 금액과 날짜만으로 이 돈이 어느 고객의 몇 월분인지 알아내야 합니다. 입금자명은 몇 글자에서 잘려 찍히는 데다 본인 이름이 아닐 때도 많습니다. 배우자 명의로 오고, 회사 이름으로 오고, 두 달치가 한 번에 오고, 금액이 조금 모자라게 옵니다.

시스템으로 치면 사람이 수행하는 조인 연산입니다. 키가 불완전한 두 테이블을 눈으로 대조해 붙이는 일이라, 붙지 않는 행이 반드시 남습니다. 어디에도 매칭되지 않는 입금이 남고, 고객 쪽에서는 분명히 냈는데 확인이 안 된다는 문의가 들어옵니다. 정기결제라면 승인 즉시 끝났을 확인이 여기서는 조사 업무가 됩니다.

울리지 않는 알람

더 큰 비용은 매칭이 아니라 침묵에 있습니다.

정기결제는 청구부터 수납 확인까지 한 줄로 이어진 자동화입니다. 결제 예정을 미리 알리고, 결제하고, 실패하면 실패를 알립니다. 실패는 반드시 이벤트를 남기니, 시스템이 받아서 다시 안내할 수 있습니다.

계좌이체 고객은 이 줄 바깥에 있습니다. 안내가 시스템의 이벤트가 아니라 매달의 기억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지 않은 입금은 이벤트를 만들지 않습니다. 결제 실패는 시스템을 깨우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깨우지 않습니다. 침묵을 알아채는 일까지 사람 몫이 되면, 미납은 개별 사고가 아니라 이 채널이 원래 가진 성질이 됩니다.

가상계좌는 이 중 매칭 비용만 지웁니다. 누가 냈는지는 시스템이 알지만, 내지 않은 사람은 가상계좌에도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침묵의 비용은 그대로 남습니다.

결제 연동의 기본값을 적은 글에서 응답이 없는 것과 실패한 것은 다르다고 썼는데, 수납에서는 한 겹이 더 붙습니다. 응답이 없는 것은 실패가 아니지만, 그 응답을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것은 실패입니다.

자동화의 이용료

미납은 요금 문제로 끝나지 않고 긴 꼬리를 남깁니다. 길어질수록 남는 선택지는 처음보다 나빠지고, 연락과 재안내와 조율 하나하나에 다시 사람의 시간이 들어갑니다. 실물이 오가는 사업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수수료는 매달 명세서에 또렷하게 찍히지만, 이 꼬리는 몇 달 뒤에 어느 계정과목에도 잡히지 않는 형태로 도착합니다.

그래서 저는 결제 수수료를 다르게 읽게 됐습니다. 수수료는 돈을 받아 주는 값이 아닙니다. 청구, 안내, 수납, 확인, 실패 통지, 정산까지 이어지는 수납 파이프라인 전체의 이용료입니다. 우회한다고 그 일들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기계가 하던 일이 사람에게 넘어올 뿐입니다.

트레이드오프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문제는 저울의 한쪽에만 눈금이 있을 때입니다. 한쪽에는 3%라는 선명한 숫자가 있고, 반대쪽에는 매칭에 드는 시간, 확인되지 않는 입금, 기억에 기대는 안내, 미납의 꼬리가 눈금 없이 얹혀 있습니다. 그 저울에서 결정은 대개 눈금이 있는 쪽으로 기웁니다.

설계자의 일

그 저울에 눈금을 새기는 것이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쪽으로 일했습니다. 가상계좌 입금을 실시간으로 받는 모듈을 만들었고(2015), 카드 정기결제를 구축해 구독 과금의 기본 채널로 세웠고(2016), 마지막이 서두의 그 미납 화면이었습니다. 몇 건이 얼마나 오래 밀려 있는지가 지표로 잡히고 나면, 같은 논의도 감이 아니라 계산으로 흘러갑니다.

언젠가 도록(dolog)에서도 돈이 오갈 것입니다. 그때의 첫 원칙은 이미 정해 뒀습니다. 돈이 들어오는 길은 가장 자동화된 길 하나로 시작할 것. 수수료는 아깝지만, 그것이 무엇을 대신해 주는지 이제는 알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