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가 7.75개 남았다고 합니다
내 연차가 몇 개인지 아무도 모르는 이유
2021년 가을, 회사에 메일을 보냈습니다. 제 잔여 휴가가 몇 개인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곧 답이 왔습니다. 7.75개입니다. 소수점 아래 둘째 자리까지 정확한 숫자였습니다. 반차 하나, 반반차 하나가 지나간 흔적이겠지요.
0.75는 이상할 것이 없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어딘가에 저렇게 정확하게 계산되어 있는 제 숫자를 정작 저는 물어봐야만 알 수 있었다는 쪽입니다. 이 글은 그 질문을 하던 사람이 어쩌다 휴가 시스템을 만들게 됐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휴가 한 번에 메일 세 통
입사하고 한동안, 휴가는 절차의 일이었습니다. 먼저 팀에 구두로 일정을 확인하고, 워드로 된 휴가신청서를 채워 승인을 요청하고, 승인 메일을 받으면 그것을 담당자에게 전달하고, 마지막으로 부재 일정을 공용 캘린더에 올립니다. 쉬는 날 하루를 얻는 데 메일이 세 통 돌았습니다. 절차를 알려 주던 메일 끝에는 괄호가 하나 붙어 있었습니다. (왠지 번거롭지만..) 번거로움을 아는 사람이 번거로운 절차를 안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보면 웃음이 나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시스템이 없으니 절차가 시스템이었고, 그 절차를 담당자들의 성실함이 지탱했습니다. 다만 성실함으로 지탱되는 것은, 사람이 바뀔 때마다 다시 지탱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숫자
사실 저는 그 메일을 보내기 전에 한 번 크게 덴 적이 있습니다. 바로 전해 연말, 반차를 쓰고 나서야 제게 남은 휴가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과 메일을 보냈습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이번에는 미리 물었고, 그래서 받은 답이 7.75개였습니다.
왜 아무도 자기 연차를 모를까요. 연차에는 법이 정한 것과 회사가 정한 것이 섞여 있고, 그래서 규칙이 아니라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입사일 기준인지 회계연도 기준인지에 따라 생기는 날이 다르고, 1년이 안 된 사람에게는 한 달을 개근할 때마다 하루씩 생기고, 작년에 남긴 연차를 이월해 주는 회사도 있고 아닌 회사도 있고, 반차는 0.5개, 반반차는 0.25개씩 깎여 나갑니다. 그러니까 7.75라는 숫자를 알려면 제 입사일과 그해의 규정과 제가 언제 몇 시간을 쉬었는지가 전부 필요합니다. 그 계산은 담당자의 엑셀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물으면 정확한 답이 돌아왔지만, 묻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숫자였습니다. 0.75개의 휴가는 그렇게 태어납니다.
휴가 마스터
몇 해 뒤, 사내 시스템에 휴가 관리를 만드는 일이 제게 왔습니다. 십 년 가까이 그 숫자를 묻기만 하던 사람이, 이제 그 숫자를 계산하는 쪽에 앉은 것입니다. 신청과 승인을 화면으로 옮기고, 발생과 이월과 차감을 규칙으로 적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관리자 권한에 이름을 붙여야 했습니다. 휴가 마스터. 담당자가 두 분이라, 화면에는 휴가 마스터 1과 휴가 마스터 2가 나란히 생겼습니다.
만들면서 알게 됐습니다. 연차 계산을 코드로 옮기는 일은 회사의 역사를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규정이 바뀐 해가 있고, 입사일은 저마다 다르고, 엑셀 시절의 기록을 고스란히 이어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연말의 휴가 안내는 더 이상 누군가의 기억이 아니라 시스템에 쌓인 기록을 기준으로 나가게 됐습니다. 이제 누구든 자기 숫자를 화면에서 봅니다. 7.75 같은 숫자도, 그 숫자가 왜 7.75인지도요. 사내 도구의 사용자를 고객으로 모시며 배운 것은 지난 글에 적었습니다.
두 시간의 휴가
반반차는 두 시간짜리 휴가입니다. 0.25개까지 세어 주는 것이 야박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저는 반대로 읽습니다. 두 시간의 쉼도 잊지 않고 적어 두는 것. 결국 회사가 만드는 도구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자기 숫자를 알게 하는 것.
요즘은 도록(dolog)이라는 걸 만들고 있습니다. 쓰는 사람은 직장인 대신 그림 그리는 작가입니다. 그래도 하는 일은 같습니다. 자기 작품이 몇 점인지, 어느 전시에 걸렸는지 묻지 않고도 아는 것. 0.25개의 휴가를 세던 마음으로 만듭니다.